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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어느 해변의 브랑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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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해변의 K-식당

키작은 노인의 말

Tigre Branco 2021. 10. 27. 13:01

조금은 나른해 지는 점심 시간의 끝자락에 가게 창 밖의 버스 정류장 옆 전자시계는 오후 2시 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어떤 한국음식이 있나?" 라며, 한 키작은 노인이 가게로 들어 왔다. 개업 후 장사가 시원치 안은 터라 한국음식에 이런 노인이 관심을 가져주니 반갑기도하고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당신에게 최대한의 친절을 배풀어 드리리라 마음을 먹고 노인에게 간단한 말을 건냈다. 나는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여기에 사세요, 어르신?" 이라고 물었다. 그러자 가게 벽에 붙은 세계지도를 가리키며 자기는 시칠리아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다시 같은 질문을 해봤다. "그런데 지금 여기 사시는 거지요, 어르신?" 노인은 결국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만 마지못해 끄덕였다. 왠지 분위기가 머쓱해져서, 쓸대없이 한 마디를 더 건냈다. "이 곳에 사신지 오래되셨어요? " 그런데 갑자기 노인은 똥씹은 표정을 하더니, 젠장 50년이나 살았다며, INFELIZMENTE! 불행하게도 라는 말을 추임새로 넣는다. 50년 전에 한 브라질 여자랑 결혼했는데, 결국 이 모양으로 살게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싫으면, 시칠리아로 돌아가면 되지 않느냐고 하니, 자기 손자들까지 여기 살고 있어서 못 간단다. 

 

지난 세월 브라질에서 얻은 몇몇 기억들이 떠올라서 그런 건 지 뭔지, 처음 들어왔을 때 보다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나는 고마워서 친절하게 간단한 질문을 건냈을 뿐인데, 이 50년 전에 결혼을 잘못하신 노인에게는 그 질문이 그에게 아주 말하기 싫은 주제 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 친절한 죄가 죄라면 죄인인 나에 대한 그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노인은 가게 문을 넘으며 가졌던 한국에 대한 긍정회로를 전면 폐기하고, 한국의 부정적인 면을 들추어 내려는 의도로 질문 공세를 펼쳤다. 첨에 남한의 지도자가 누구냐? 라고 묻더니, 이내 남북 주소가 잘 못된 것을 뒤늣게 인지하고 그게 아니라 북한의 지도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김정은'이라고 했더니, 우리가 잘 아는 김정은의 악행에 대해 열거하며, 한국인들의 지난 수십년간의 시간이 지옥과 같았을 것이라고 했다. 노인은 남북한을 구별하지 않았다. 의도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랬다.

 

그런데 노인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니 웃기게도 갑자기 킬링필드와 크메르루즈 이야기가 소환되어 김정은의 악행으로 둔갑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통의 한국인들 이야기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기에는 좀 쌘 이야기가 필요했었을 지도 모른다.

나의 친절의 결심은 킬링필드와 크메르루즈 이야기의 시작을 개기로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나는 오디어 믹서의 친절한 톤래버를 가장 아래까지 내려 버린 뒤에 "영감님, 틀렸어요" 라고 했다. 지금 하신 이야기는 한국이 아니라 INFELIZMETE! 캄보디아였다고 말씀 드렸다. 노인은 더 이상 한국 이야기도 않고, 브라질의 지난 세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본인의 반격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 한 것이 쓰라렸던 것일까? 아니면 지난 50년 동안 고통스러운 역사의 한국인 보다 도 더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는 착각과 자괴감이 들었던 것일까? 노인은 밥도 다 안먹고 조용히 돈을 내고는 가게 밖으로 나가 쓸쓸하게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 아까는 보지 못했던 가게 앞에 주차한 자신의 차 쪽으로 걸어 갔다. 노인의 차는 최소한 30년 이상은 된 것 같은 녹슬고 낡은 주황색의 폭스바겐 비틀이다. 그의 원망스런 지난 세월을 보는 듯해 내 마음 한 켠이 가라 않았다.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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