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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어느 해변의 브랑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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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 앎과 느낌의 경계

부정할 수 없는 것

Tigre Branco 2024. 5. 31. 12:10

자신의 삶에 대해 나의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혹은 집중해서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가 힘든 것이다. 나의 삶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오롯히 내게 주어진 것이며, 그 것에 대한 생각에 나의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정의 혹은 설명한 것에 대해 수긍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 그 사회의 정의 혹은 설명이 정답이 될 수가 없는 것은 학력고사에서 수능이 5지선다로 바뀌며 찍기의 확률을 떨어뜨린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알려진 것만으로도 인간의 삶에 대한 수많은 정의와 설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오늘 생각하는 것은 나에 대한 혹은 나의 삶에 대한 그런 다양한 정의와 해석을 바라보며 정작 나의 곁에는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무언가 내게 있는 감각과 이성으로 분명한 것을 찾으려는 의지에 집중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에 조금 더 다가가고 있다. 

 

한 때 내가 고민한 것은 0그리고1이라는 것이 었다. 0은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며, 1을 존재함을 말한다. 데카르트식 결론을 빌리자면, 나는 0그리고1을 생각한다 그리고 존재한다. 최소한 어떠한 정의와 설명을 통해 이 상황을 말하더라도 나는 지금 1이자,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다른 정의와 설명을 통해 부정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하여도 나의 생각의 그리고 감각의 발자국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포맷을 할 수 있지만 그 발자국을 포맷을 하였다는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0이다. 이 뭔지 모를 1의 때를 보내고 나면 0이 되는 것이다. 1을 은총이라 보든, 수레바퀴로 보든, 우연의 결과로 보든, 서정적으로 소풍이나 연극으로 보든 결걱 그냥 1은 0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심장이 쫄깃하게도 그 때와 시간은 인간 중에서는 아무도 알 수 있는 이가 없다. (이 것이 내가 어떤 인간을 볼 때도, 측은함을 느끼는 이유기도 하다) 

 

 오늘 나는 내가 왜 이 곳에 있는 지, 내게 주어진 무지개의 빛처럼 다양한 감정과 상황 그리고 이야기가 존재하는 지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나는 단지 나에게 집중하고 싶을 뿐이고, 내게 보이는 진실을 향해 미소를 짓고 안고 입맞추고 싶을 뿐이다.

 

 

31.0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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