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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해변의 K-식당

13년 전, 란저우의 새벽

Tigre Branco 2022. 2. 7. 20:13

어떤 때는 그 모자가 생각이 난다. 우리는 불고기를 같이 먹었다.

 

기차로 도착한 란저우의 이른 새벽은 다소 섬뜩했다. 새벽 세시에 그 넓은 도로에 수많은 청소부들이 흙과 먼지 그리고 쓰레기들과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청소부들이 만든 흙먼지와 어스름한 가로등의 노오란 불이 만나 으시시한 잿빛도시를 만들었다. 역 근처에 이리저리 간판을 내건 허름한 초대소들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그 간판의 형광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음산한 느낌의 이 도시를 좀 더 알기 전까지 나는 쉽게 내 몸을 어디에 누일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몇 시간, 차가운 공기 속에 걷다가 보니 아침이 성큼 내게 다가와 있었다. 따스한 자연의 조명은 이도시를 내게 점점 편안하게 만들어줬고, 이제 난 걷기를 멈추고 어디에든 날 누이고 싶어졌다. 가이드 북을 꺼내 란저우 시의 지도를 찾는다. 그런데 문제다. 내가 걸었던 섬뜩한 란저우의 새벽길이 나를 지도의 아주 외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제 내 등에 걸린 커다란 배낭이 내 어깨죽지를 견디기 힘들만큼 세게 짓누르고 있고, 출근길에 수많이 모여든 인파 그리고 갑자기 밝아진 자연광의 조화가 주는 압박이 내 육체적 피로와 만나 나를 그 자리에 주저 않혀 버렸다. 

 

그리고 얼마인지 시간의 흐름도 상관 않은채로 아니 상관할 수 없던 채로 그렇게 있었다. 나는 린이에서 쿤밍으로 따리, 리장, 샹그릴라 설산을 올랐으며, 이제는 실크로드를 향해 떠나기로 맘먹고 씨안을 거쳐 동양 판타지 소설의 대작 서유기의 배경인 란저우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나의 지친 몸과는 상관없이 나의 의식은 지난 몇주간의 발자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머릿속을 걷고 또 걷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어두움이 내 앞에 드리웠다. 분명히 하늘은 맑은데, 어두움의 핀조명을 받은 듯 내 앞에만 어두움이 쏟아졌다. 그리고 지난 여행의 기억들이 모조리 영사기에서 쏟아지듯 검은 길바닥에 쏟아졌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발버둥을 쳤다. 내 주위를 지나는 수많은 행인들을 의식하며 억지로 날 깨워갈 그 때 쯤, 그 때에 내가 마주한 것은 한 눈빛이었다. 따사롭고 자애로운 내게 다른 이해관계나 사심이 없이 그저 나를 품어주려는 모성의 눈빛. 그녀 뒤로 부터 비치는 자연광이 후광이 되어 나만을 위한 한 폭의 성화가 내 눈앞에 드러났다. 그 여인은 내게 입을 열어 따듯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중국인이냐? 내가 도와 줄 것이 있느냐고...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몸이 풀리며 다시 일어나고 걷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란저우의 음산한 새벽공기는 내게서 완전히 사라졌다.

 

란저우의 마지막 날 가방을 정리하다가 그녀가 남긴 명함을 꺼내 들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 일이 있던 다음날 나는 감사의 의미로 한국식당에서 그녀와 그녀의 아들에게 불고기를 대접했고,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테이블 위로 내게 자신의 명함을 전달한 것이었다. 그녀의 성은 장씨 였으며, 작은 회사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서유기의 땅 란저우에서 이번 여행 중 처음 만난 섬뜩한 기운과 미친듯이 걸다가 혼란 속에 그저 주저않아 버린 내게, 내 앞에 나를 구할 존재로 나타난 구원의 마돈나. 그때 란저우의 아침에 내게 무슨일이 있었던 걸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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