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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어느 해변의 브랑코씨

26년 3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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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3월

Tigre Branco 2026. 3. 2. 13:59

2일

*이란에 폭격을 단행했다. 서사적인 분노라고 해야 할까. 작전명에서 미국 정계가 이번 작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나는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전쟁에 대한 그리고 이란 폭격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유튜브를 봤다. 이번 폭격의 당위성이나 이스라엘 및 미국의 불법적 공격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지금 이란이나 여전히 끝나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이는 민간인들의 고통에 대해서 언급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견을 내는 가운데, 그들의 상황을 보면 다 강건너 불구경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미사일을 통한 폭격이라는 큰 불이 났고, 사람들이 (절제된 사회의 언어로써) 이러쿵 저러쿵하는 모습이다. 결국 심각하게 포장해서 떠들지만 자기 일은 아닌 것이다

 

부정선거에 대한 정의라는 부분에 내 마음도 큰 부침이 있었다. 분명히 부정선거의 정황이 있는데, 그에 대한 수사가 전무한 상황에서 정의가 사라진 국가의 한 국민으로써 답답함이 이를 때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전쟁에 대해 의견을 내는 유튜버들을 보느라니 나는 부정선거에 대한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강건너 불구경을 하는 거 같기도 했단 말이다. 그랬다 나는 분명하게 건너편이 있다. 강도 아니고 가장 큰 바다인 태평양을 건너서 남미에 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며, 육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은 다신 태어나는 자에 한해서, 즉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그들의 영의 구원이 있다고 하셨다. 

 

매일보는 유튜브를 보면 그렇다. 육의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육들이 사회속에서 만들어내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평화의 시기라는 것도 어떤 개인에 따라서는 평화가 아닐 수도 있다. 질병의 극심한 고통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최소한 그의 육체에 대해서는 평화의 시기는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남은 생을 살아야 할까? 육일까 영일까? 영이라면 어떤 삶을 말하는 것일까? 그저 믿음안에 답은 이미 나와있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매일 반복되는 육의 이야기에는 어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노병사의 수레바퀴를 전혀 벗어 날 수 없는 가련한 존재를 극복할 수 없는데, 뭘 기대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육의 집합체인 사회를 보아도 답이 나오 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심지어 그 사회의 역사라는 것을 돌아보면 썩은 내와 굼뱅이가 그 안에 가득한 바닥에 버려진 상한 고기 덩어리이며, 자기 육체의 생존만을 위한 본능적인 몸짓만이 가득한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공연에 다름아니라는 나의 감상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어떤면에서 난 갇혀있다. 이 지구라는 감옥에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비참한 존재로써 말이다. 이런 위안이 없다면 난 진즉에 이 곳에서 살아지나 그렇지 않으나 아무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강건너 불구경하는 것 말고는 달리 그리고 특별히 할 것없는 존재로써 말이다.

 

나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아니하고 멸망치 아니하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3장16절.

 

*에디스라는 책속의 아이를 알게된 건 2주일 전이다. 혜림이가 학교에서 본다는 책이 내 책상에 높여 눈이 가게 되었고 잠깐 펼쳐보다 읽게 되었다. 에디스는 책표지의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빛바랜 흑백 사진의 어린 소녀의 모습에 아기인형을 안고 있는 모습이다. 유대인인 에디스는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이 시대의 비극으로 아빠와 먼저 그리고 엄마와 남동생마저 생존을 위해 해어지게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 비참함 속에서도 긍정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어린 소녀 에디스의 모습이 눈물겨웠다. 

 

그리고 현실 속의 나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가하고 있는 폭력으로 인해 에디스와 같이 비극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팔레스타인이나 레바논의 아이들과 아이들의 가족 이야기를 듣는다.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독일 나치의 폭력 (어쩌면 독일 나치로 대변되는 유럽 사회의 오랜 폭력이라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독일은 가장 근래에 대규모로 폭력을 자행한 것이지, 독일만 저지른 일이 아니므로) 속에 흑암의 시간을 견뎌내야 했던 그 사람들의 자손들이 이제는 가해자가 되어 무자비한 폭력을 같은 방식으로 저지르고 있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죽어갔고, 그 중 다수는 아이들과 여자와 노인들이었다. 

 

에디스가 이 장면을 볼 수 있다면, 에디스는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유대인 가족들이 다시는 어떠한 폭력에 의해 희생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마찬가지의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에디스는 진정 생각할까? 

 

내게는 인종간의 차이점이라는 게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가 않는다. 뭐가 인종적 차이란 말인가? 두피에 붙은 머리카락과 근육과 지방에 붙은 얇은 껍데기를 벗겨 놓으면 육안으로는 인종같의 차이는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오히려 에디스와 폭격으로 다쳤지만 병원에 갈 수도 없이 길바닥에서 어미를 찾고 있던 아이의 모습이 더 공통점이 많아 보인다. 유럽인들도 대의와 공동의 선을 위해 유대인들을 상하게했고, 이스라엘도 같은 논리로 팔레스타인의 민간인들을 상하게 했다. 아주 많은 숫자의 민간인들을 몇년간. 뿌리를 뽑을 듯한 기세로.

 

내 양심으로는 선이라고는 부를 수가 없겠다. 둘 다.

 

에디스의 양심으로도 착한 사람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만 같다.

 

3일

* 진실이라는 게 뭘까?

이란의 보복 공격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돌아가는 상황도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단순한 착한편 나쁜편. 내편 니편 이야기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선과악의 게임에 빠져서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빨고 있는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그래도 그 중에서 더 진실한 사람은 보이기 마련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 곧 진실과 진리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이 본성에 의해 하고자하는 대로 하게 하셨다. 그리고 정해진 신의 스토리대로 예수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정치가 아니고, 역사도 아니고, 인간 세상의 행복이나 번영도 아닌. 

 

그의 메시지는 믿음이었다. 

 

모세의 뱀이 들리듯, 예수도 들렸으며, 그를 믿음으로 보는 자들에게 단 하나의 길이 있을 지어다. 아멘. 

 

이를 믿는 자는 그리스도인이고, 그렇지 않은 자는 안티 그리스도인이다. 

 

이분법이라고 폄하하기 보다는,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자연 현상과 같은 그저 당연한 이야기의 선상에 있다.

 

물론 이 이야기에 동의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의 선택이며, 신이 주신 자유의지라고 할 것이다. (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개별 이성적 판단이라 할 것이며)

 

이게 다이다. 의심스러우면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읽어보라.  

 

*선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세족식을 보라. 내가 가진 것으로 남을 섬기는 것. 

 

힘으로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존의 본능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섬김으로 조롱과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이야기, 그 것이 참 인간이 궁극적으로 믿고 따라야 할 길이다. 

 

좁은 길을 가라. 

 

7일

*깨달음과 그 깨달음의 휘발성

적어도 내게는 자주 반복되는 일상과 같은 말이다. 오늘 아침에 어떤 깨달음이 있었고, 난 베이라마를 걸었다. 항상 기뻐하라 라는 말의 당위성에 대한 깨달음. 난 플라타너스나 해변의 바위 혹은 저 하늘의 구름 같이 결단코 창조된 존재이며, 그래서 삶의 유한함이나 다른 어떠한 내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상황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이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 그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채 30분이 되지도 않아 깨달음의 HIGH에 취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약국 직원의 불친절에 그냥 기분이 다운되어 버린다. 뭔가. 이 그지같기가 그지없는 이 상황은 뭔가. 잠시 후 나의 최신 깨달음은, 항상 기뻐할 수 밖에 없는 나라는 가뿐한 진리이자 깨달음은 아침이슬이 이글거리는 8월 아침 땡볕이 기화되듯이 사라지고, 잠시만 기뻐한 나로 나락가고 말았다. 

 

저녁에 그냥 오늘의 깨달음이 되세김질 되는 그 저녁 어느 시간에 나를 자극하는 상황을 만나게 되다. 어제부터 이어진 까롤의 '보여줄께 완전히 달라진 나' 모습에 자극을 다시 받고, 그래서 난 다시 그 깨달음을 다시 놓아 버리게 되었다. 기쁨이 날아간 것이다. 마치 헬륨가스로 채워진 풍선이 어느 찰나에 저 높이 눈에서 멀어지는 것과 같이. 

 

휘발성이 이렇게 강할 수가. 

 

13일

*저녁 시간에 가게 밖으로 잠시 나와서 내가 대화를 짧게 혹은 좀 더 길게 나누었던 사람들을 보며 맘이 흐뭇해짐을 느꼈다. 사랑이라는 따스함이 그 공간에 흐르고 있었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맘은 유쾌해졌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행복과 지혜를 발견하라고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인가? 왠지 그럴지도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가시지를 않는다. 오늘처럼 이렇게 강한 느낌과 함께 이런 생각이 든 적은 아마 없지 않았을까? 손님들, 그 사람들을 만나고, 그 생각을 들어보는 것이 오늘 내 맘을 뛰게 했다. 

 

어제 만난 Carlton 할아버지. 그 연세에 비하면, 남미를 여행하며 한식당을 찾아다닐 정도이시니 한식에 진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길눈도 어둡고, 더 이상 젊을 때의 힘도 없고, 포르투갈어도 잘하지 못하는 Carton 씨가 혼자서 지금 브라질을 포함해 여행을 한다는 것이 그냥 자유롭고 좋아 보인다. 언젠가 오셨던 상파울루에서 모자를 팔아 성공하신 한국인 할아버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99푸드의 롱선생과 최사원 그리고 다른 한 직원이 우리 가게에 자주 왔었고, 어제를 마지막으로 이제 마나우스로 떠난다. 가만 보니 어제 점심에도 해물전을 시켰는데, 저녁 식사도 우리 식당에서 하러 와서 또 해물전을 시켰다. 해물전을 좋아하는 롱선생이다. 99푸드의 소나기 같은 30분의 주문이 그저께 아침 첫 시간에 있었고, 그날이 99푸드의 포르탈레자 시의 첫 개시날이었다. 많은 기대를 했는데,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해야 할까? Ifood와는 전해 다른 포인트에서 식당주들을 기만하고 있었다. 비용을 식당에게 전가한 프로모션과 너무 후려쳐진 음식값에 나와 경미는 황당해했다. 그 땜에 Ifood와 99푸드를 비교한 표도 만들고 나름 공부를 하게 되었다. 롱 선생님에게 인상이 좋아 보인다고 했더니, 완전히 이해는 못 했는데, '그런 소리를 많이 듣기는 하는데, 잘생겼다는 말은 아닌 걸로 알겠다'는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롱선생을 보다가 그 옆의 일본계 상파울로 출장 손님을 보니 묘한 느낌이 든다. 지금으로 부터 100년 전에는 우리가 서로 다른 평가 기준을 가지고 서로를 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평가기준이야 항상 바뀌는 것이지만, 그 당시의 분위기가 살벌하다 못해 새로운 이념의 확산과 식민지 경제의 확산으로 혼란에 빠진 우리들의 할아버지와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어땠을까?오늘 처럼 한국인 나와 중국인 롱선생 그리고 일본계 바로 옆 한 공간에서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대화하며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 

 

두 친구, 케이시와 더치보이는 너무 고마운 느낌이 드는 두 사람이다. 이제 한 달을 채우고 돌아갈 때가 되어 작은 기념품을 건냈다. 브랑코가 세겨진 창모자와 핫소스를 받은 두 사람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예의도 바르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인것 같다. 내가 어의없이 나온 사진을 그의 부탁으로 건냈다. 오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온다는데, 참 고마울 따름이다. 돈이 생기면 그 사람들의 프로젝트에 투자라도 하고 싶을 만큼.

 

18일

*나의 삶의 시간 이야기가 담긴 일기다. 안네의 일기나 에디스의 이야기도 특별하지만, 내 이야기도 만만치 않다. 신이 내게만 주신 내 삶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전화를 내일 드리자. 일요일에 전화가 오셨는데, 받지 못했다. 참 좋은 분이다. 부모님이 다 좋은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우리 부모님은 인간적으로 좋은 분들이다. 또 감사한 점은 내가 뭘 하든 지 별 말이 없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 있게 된 것인데, 글쎄, 그래서 결국 두 분은 나를 멀리서 카톡으로만 느끼고 있다. 인터넷 시대가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20년도 더 전에 미국에 갔을 때는 긁는 카드를 사서 집에 전화하곤 했고, 감도 좋지 않으며 전화비도 비싸서 자주 전화를 드리지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영상통화로 혜림이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얼굴을 보며 통화할 수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오늘 우리 아파트에 사는 상파울로 할머니, 가끔 그 곳에도 집이 있어 마나우스를 여행하시고, 한국음식과 소맥을 좋아하셔서 자주 우리 가게를 찾으시는 그 할머니가 아들과 함께 저녁 첫 손님으로 오셨다. 아들은 여기에 살고 있는데, 왠지 정감이 가는 스타일이다. 통통하고 적당히 긴 짙은색의 곱슬머리에 썩 친근하지는 않아도 대화하는 것을 즐기는 친구다. 제 어머니 때문에 같이 소주를 마신 술로 한 잔 시키면서 자신의 취미 활동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대부분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아파트 내의 불법인지 합법인지가 조금 불분명한 증류주 미니 양조장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구리로 되어 있는 양조장비와 당도 측정기 및 다양한 형태의 스포일러 같은 여러 도구들을 소개하는데 참 애정이 가득해 보였다. 장비를 보니 마치 실험실 같다고 했더니, 기분이 더 좋아진 듯, 내 반응에 만족감을 보였다. 어머니께 선물로도 드리냐고 하니, 그렇다고 해서 최고의 선물이라고 했더니, 할머니도 맛이 기똥차다고 하셨다. 엄마와 아들이 이런 작은 재미로도 즐거울 수 있는 게 좋은 것 같다. 술이 몸에 좋지 않으니 다른 취미를 가지는 게 낫겠다라고 의사들은 말하겠지만, 나는 두 사람의 작은 재미를 폄하하는 냉혈인간 부류는 아니라, 이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다. 얼마 전 세계 최고령인 122세의 프랑스 할머니의 식습관이 화제였다. 식사는 튀김을 자주 즐기고, 초콜릿은 디저트로 빠지지 않고, 와인도 좋아한다는 이 할머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인간의 탈을 쓴 외계인인가? 우리와는 반대로 먹어야 오래 사는 신체 구조를 가졌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이 기사의 말미에 할머니의 나쁜 식습관을 해독할 만한 좋은 생활습관이 공개되어 내 시선을 끌었는데, 그것은 할머니가 걱정 없이 산다는 것이었다. 고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걱정 없이 사는 게 그녀의 122세란 최고의 타이틀을 거머쥐게 한 디톡스 주스였던 셈이다. 

 

카샤사를 빚으며, 즐거운 취미생활도 하고 사랑하는 애주가를 엄마에게도 선물하고 주거니 받거니, 스트레스를 안 받으며 즐겁게 사는 두 모자가 좋아 보였다. 물론 나는 그렇게 술에 빠지고 싶지는 않지만. 

 

20일

*아버지께 카톡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되지 않았다. 어제도 전화가 되지 않았다. 웰까?

 

*파트리시아라는 Nuths사의 직원이 다녀갔다. 위생허가 컨설팅회사 직원인데, 오늘이 휴일인데도 일 분도 늦지 않고 가게에 와 줬다. 까롤 말로는 쇼핑에서 일할 때 좋은 회사였다고 하는데, 이 직원을 보니 그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한 시간 정도 나는 파트리시아의 뒤를 쫓아다니며, 그녀의 궁금증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친절한 답변을 해 주었다. 이미 알고 있던 바지만, 역시 준비할 것들이 많다. 까다롭다. 하지만 냉동식품을 팔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지난 주말에 아래 창고와 재활용품과 잡동산을 모아 놓은 식당 뒤편을 정리하고, 지하실 계단에 묵은 기름 때도 오랜 시간이 걸려 일부 제거하기도 했다. 오늘도 오늘 지적이 된 주방의 지저분한 천장을 알코올티슈로 일부분을 닦고 왔다. 시간이 그렇게 가는 지도 몰랐는데 집에 와 보니 거진 밤 12시다.

 

*오늘의 하루라는 뭔가가 지나갔다. 뭔가 말장난 같은 오늘의 하루. 이건 하루가 있고 이틀이 있고 삼일이 있는 것 같은 말장난이다. 나는 그냥 내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오늘이 지나갔다는 황당한 말장난을 나는 듣고 있고, 나도 그 말장난에 익숙해져 이게 말장난인지 실재인지 혼돈 속에 살아간다.  

 

*어제 에어컨 청소를 하고 늦게 가게에서 나오다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니는 앉은뱅이 아저씨를 마주쳤다. 이 사람을 안 지도 한 7, 8년은 되는 것 같다. 처음에는 스케이트 없이 팔힘으로만 길을 다니다가 어느 순간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우리 동네를 훨씬 빠르고 편하게 다녔던 그였다. 이름 모를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는데, 다리가 있던 사람이 나쁜 일을 당해서 저렇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안 된 사람이다. 참 운도 복도 없는 사람이다. 돌보는 이 없이 외롭게 이 늦은 밤에 스케이트보드만 안고 멍하니 저 앞 고층 아파트 편을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방금 내가 한 말이 사실일까? 죽었다 깨어나도 맞는 말이라 할 수 있을까? 참 운도 복도 없는 놈이라는 내 동정 어린 말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그렇다고 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해서 그게 맞는 말일까? 

 

이 말꼬리를 잡는 이 질문들에 대답을 하자면, 꼭 그 사람이 그렇지는 않다. 혹은 꼭 그 사람만 그렇지는 않다고 하겠다. 그 사람이 불쌍한 거지, 앉은뱅이가 아니라 예수를 만날 앉은뱅이일 수도 있다. 그리고 몸이 불구인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서 나쁜 것을 배워 마음이 앉은뱅이의 다리같이 불구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어쩌면 우리 모두일지도 모른다. 

 

ps. 이분 말고 눈이 뒤집혀 흰자위가 보이는 앉은뱅이 광인도 생각이 난다. 언젠가 가게에서 만나 같이 놀러 다닌 지금은 잊어버린 많은 사람들보다 왠지 이 사람 둘은 기억이 남고 내 머리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각인된 것처럼.

 

20일

* 구약과 신약의 사람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자신의 논리에 구약과 신약을 아전인수 식으로 가져오고, 거기에 신의 이름을 가져다가 붙이는 사람들. 뭐 항상 그랬지만, 전쟁이 나서 업되고 수많은 찌라시가 유튜브 하수종말처리장에 분단위로 집결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이전투구, 그냥 진흙탕 싸움이다. 

 

구약의 메시지는 정의라고 하겠다. 신약의 메시지는 용서와 사랑, 비폭력 저항이라고 하겠다. 정의로움의 이름으로 이스라엘과 미국이 그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사람들을 죽인다. 마찬가지로 이란도 정의의 이름으로 보복을 한다. 훨씬 적은 숫자지만, 어쨌건 사람을 죽인다. 

 

신약에서 만나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서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가져다 대는 사람은 신약의 메시지에 충실한 사람이겠다. 손양원 목사님처럼 아들을 죽인 자를 양아들로 삼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약 성서를 믿는다며 전쟁을 옹호한다는 사람들이 나는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예수와 그 제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신약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말이다. 그냥 구약 성서에 따라 정의를 위해 구약의  때때로 잔혹해 보이기도 하지만, 대의와 정의를 위한 그 행동들은 그나마 생각과 행동이 일치한다고 할 것이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그 경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전쟁이라는 설명은 일부분 이해가 가기는 한다. 그러나 애굽부터 로마에 이르는 성경에 등장한 모든 제국이 오만함으로 결국 다른 제국으로 끝없이 물갈이 되었던 사실은 니가 말하는 정의가 금새 오만함의 이끼로 덮혀 썩어문드러질 정의는 아닌 지 늘 돌아 봐야한다. 그런데 그들이 오만하지 않은가 하면,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늘 든다. 

 

그냥 신약의 용서와 사랑, 요한을 제외하고 사도가 모두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 그 비폭력 저항의 정신이 없다면 그 전쟁에 신약의 신앙을 섞지는 말아야 겠다. 왜 물과 기름을 섞고 그 것을 순전한 물이라고 선전하고, 자신을 참이슬로 포장하는가?

 

 국가와 개인의 차원은 다른 차원이라는 반론을 받아들이겠지만, 개인의 입장에서 성경을 믿는 사람으로써 혹은 진리라고 고백하는 사람으로써 괴리감이 있는 현상에 대해 무지성으로 앞서서 말하는 스피커들을 따라서는 안 될거다. 

 

25일

*주저리 주저리

글을 써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내 책상을 정리하고, 내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 

 

가만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던 모양이다. 경미의 생일이 오는데, 경미가 함께 있다는 사실과 내 옆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이 더할 나위 없지만, 생일 따위를 생각하느라 기분이 상하기가 싫다. 작년 내 생일즈음하여 있었던 에피소드는 그냥 생각하기 싫은 장면들이다. 내 생일을 애써 무시하고, 나는 그걸 못 받아들이고 나이가 들어도 나이값을 그렇게 못 했다. 그렇다고 해서 경미에 대한 마음이 바뀌는 것은 절대 아니고, 그저 그런 일이 반복되거나 내가 기억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서로 생일을 축하하지 말고, 일상이 서로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날들의 연속이기를 바라면 좋겠다. (생일을 지난다고 우리삶과 우리 주위의 삶이 그로 인해서는 전혀 바뀌는 것이 없다는 이유와 함께)

 

28일

*바퀴벌레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잘못이라면, 우리 집에 들어온 게  잘못이지. 자연법으로나 성문법의 범주에 놓고 보았을 때, 주거침입죄로 사형이라는 건 초법적 행위일 따름이다. 

 

그리고 저 뉴스를 보니, 초법적인 행위가 만연하다. 

 

세상은 그저 법이 존재하지 않는 동물의 왕국이다. 

 

우와우와 지구는 숨을 쉰다. 피네음을 마신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그의 삶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지만,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의 갈 길이며, 나의 등불이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반하는 사람들 중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음을 본다. 

 

그리스도의 평등과 사랑이 못가진 자가 가진자를 살해함으로 결국 이루게되는 평등과 사랑으로 생각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자유와 희망이 나의 욕망을 채우려 칼로 너를 쳐서 쓰러뜨리더라도 신이 주신 자유로 생각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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